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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 삼현
여말 삼현
이야기
의정부 송산동에는 삼귀라 불리우는 마을이 있다.
고려가 망하자 조견, 원선, 정구 등 3인은 조선조의 신하가 될 수 없다하여 이곳 삼귀에서 살았다.
이 세 어진이 함께 들어왔다 하여 삼귀가 됐고, 조견의 호를 따서 송산동이라 부른다.
조견은 어려서 승려가 되어 여러절의 주지를 지내다
30세가 넘어 환속 한 후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가 되어 왕명을 받고 지방행정을 감사한다.
안렴사의 자격으로 영남지방에 내려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양왕이 원주로 쫓겨나고 국새가 이성계 손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다.
조견은 대성통곡하면서 두류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평생을지내려 작정한다.
그러던 어느날 이태조가 전갈을 보내 큰 벼슬을 줄터이니 조정에 들어 오라고 하나,
조견은 단호히 거절했다.
하루는 이성계가 형 조준과 함께 청계산에 찾아왔다.
"만일 그대가 나와 함께 나랏일을 돌본다면 어찌 창생의 즐거움이 아니겠소"라며 조정에 들어와 줄 것을 당부하였으나,
"나는 고려의 신하이지 새 왕조의 신하는 아니오"라며 끝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자, 이성계가 탄식하며 청계사를 떠났다.
태조는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개국공신2등 평양군으로 봉한다.
그러나 그는 모두 버리고 이곳 송산동 삼귀 마을로 자리를 옮긴다.
그가 임종할 때 자기의 묘비석에 고려관직만 쓰라고 했으나,
자손들이 유언을 어기고 '조선개국공신평성부원 군조견지묘'라 새겨 비석을 새웠다.
그러자 그날 밤, 뇌성벽력이 내리치면서 '조공지묘' 넉자만 남기고 비석이 모두 부서졌다고 한다.
원선은 고려말에 판삼사 좌윤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관복을 벗어던지고 이곳 송산에서 은거한다.
"충신은 불사이군이요 열녀는 불경이부 이거늘 내 어찌 고려의 은혜를 버리고 새 왕조의 신하가 된단 말이요"
이성계가 사자를 보내 여러 번 조정에 들어올 것을 권고했으나 그때 마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거문고와 퉁소를 다루는 솜씨가 남달리 빼어났는데
조견의 맞은편 동네에 살면서 매일같이 퉁소를 불어 서로의 안부를 전했다고 한다.
정구는 고려 우왕 3년(1377)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부령을 지내다 임견미의 모함으로 귀양살이를 하던중
고려가 망하자 이곳 송산동에서 은거했다고 하나 확실한 행적은 짐작하기 어렵다.
용현동 효자봉 중턱에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는 그가 죽은지 343년 후인 1761년에 건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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