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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원동

호원동(虎院洞)

호원동 지도

호원동은 서울시와 접하는 의정부시의 관문으로서 동(東)으로는 중랑천(中浪川)을 사이에 두고 장암동(長岩洞)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西)로는 도봉산(道峰山)이 펼쳐져 있는 의정부시의 최남단 동(洞)이다.

본래는 호동(虎洞)·누원리(樓院里)·장수원리(長水院里)였던 것을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호자(虎字)와 원자(院字)를 따서 시둔면(柴芚面) 호원리(虎院里)로 개칭하였다.

1956년에는 당시의 둔야면(芚夜面) 호동(虎洞)을 호원1리, 누원리(樓院里)와 장수원리(長水院里)를 호원2리로 분할하였다.

이후 1964년 5월 8일 「의정부시의명칭과구역에관한조례」를 개정 공포(조례 제19호)하여 동년(同年) 6월 1일 동제(洞制)가 실시됨에 따라 호원1·2를 합하여 호원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테이블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호원동 지명 유래 안내입니다.
다락원(樓院) 조선시대에 함경도 원산에서 강원도 철원을 거쳐 포천에서 다락원을 통해 서울로 가는 상품 교역의 길이 번창하였는데, 서울로 들어서는 관문인 이곳에 누원점(樓院店)이라는 상점이 생기게 되면서 다락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곳 다락원에는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의 물품이 집하되어 서울로 반입되면서 중간상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또한 원산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건어물을 사재기 해두었다가 서울 상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거나 상품을 공급하지 않아 서울 상인들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하였다. 누원은 상누원(上樓院)과 하누원(下樓院)으로 번창하였는데 상누원은 지금의 서울시 도봉동이고 하누원은 의정부시 호원동이다.
장수원(長水院) 조선시대에 이 곳에 원(院)이 있었는데 의정대신들이 태조(太祖)와 정무를 논하러 의정부까지 오던 길에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하여, 다락원을 거쳐 서울로 가는 상인들도 이곳에서 쉬어가면서 주막거리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장수원이라는 지명은 구바위소에서 흘러오는 물이 하류의 삼형제소까지 길게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바위소(沼)터 구바위소는 회룡사계곡(回龍寺溪谷)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구바위에 부딪혀 형성되었던 소(沼)로 명주 한 필이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으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물의 흐름을 외미 갱개(更改)로 바꾸어 놓아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삼형제소(三兄弟沼) 삼형제소는 작은 소(沼) 세 개가 가까운 거리를 두고 연이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맏형소(沼)는 망월사계곡(望月寺溪谷)에서 흘러나오며, 셋째소(沼)는 공주묘골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구바위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합쳐져서 소(沼)를 이루었다.
연못계 터 연못계 터는 다락원에서 공주묘골을 오르자면 개울을 건너기전 연못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집이 들어서 있다.
공주묘골 공주묘골은 도봉산(道峰山) 중턱의 골짜기로 조선 중종(中宗)의 둘째 딸인 의혜공주(懿惠公主)와그 남편 한경록(韓景祿)의 무덤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배나무골과 샘골(사이골)이 있는데, 배나무골은 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샘골은 서울시와 경계를 이루기도 하고 샘물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험한골 험한골은 오르기가 힘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곡식을 쌍아 놓은 노적과 같이 생긴 노적봉이 있으며, 대문과 같이 생긴 대문 바위와 족두리와 같이 생긴 족두리 바위(얹힌바위)가 있다.
독박골(독바위골) 독박골은 공주묘골의 오른쪽 골짜기로 독바위(纛岩)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독바위는 옛날사람들이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빌던 곳이다.
거북골 거북골은 독박골의 아래쪽 골짜기로 비석을 받치던 거북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만장봉(萬丈峰)

만장봉은 도봉산 상봉(上峰)에 있는 봉우리로 바위가 수직 절벽으로 높이 솟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만장봉에 대해서 매월당 김시습과 낙곡 진익한이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도봉첨수(道峯尖岫)
    이빨 같이 솟은 산봉우리 무딘 창끝 같고 / 늙은 소나무와 등나무는 바람 서리 이겨내고 아득히 나부끼는 깃발마다 절들이 널려 있고 / 천둥치면 번개는 푸른 하늘을 가리네 서리맞은 단풍은 골치 아픈 나그네 잠재우고 / 바위 위에 내려 녹은 물은 사람의 오장육부를 씻어내리 하염없이 바라보니 눈시울만 시렵고 / 나무위로 떨어질 듯 하늘높이 기러기 날아 올라가네
  • 만장봉(萬丈峰)
    만장봉이란 그 이름 지금까지 몇 해나 되었는지 / 높고 가파른 절벽 어마어마 하기도 하지 꿈틀거리는 용이 땅으로 내려와 엎드린 것 같은데 / 잽싸게 나는 송골매는 하늘을 가르는 것 같네 산꼭대기에 자생하는 송이버섯은 채취를 당했고 / 절벽에 푸른 소나무 드믄드믄 서 있네 높은 절벽을 곧바로 올라가 볼까 / 푸른 바다로 눈길을 돌리고 절벽바위만 세 번 어루만졌네
성지(城址) 터 성지 터는 호원동 106번지 일대로 6.25사변 전까지는 이 곳에 성터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지명은 영(營)재, 병문안(兵門案), 이성(二城)재, 삼성(三城)재, 둔뱀이와 관련된 것이다.
딸딸이밭 딸딸이밭은 넓은 모래밭으로 갈대만 무성하여 농사에 전혀 쓸 수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백나들이 동백나들이는 장수원의 주막거리로 통하는 길로 봄이 되면 길손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동막골의 입구이다.
안말과 바깥말 안말과 바깥말은 장수원 뒤의 마을로, 산 밑쪽은 안말이라고 하고 바깥쪽은 바깥말이라고 한다. 안말은 안평대군의 영당과 묘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진등 진등이라는 명칭은 의정부에 20여곳이 있는데, 이 곳은 호원동사무소(虎院洞事務所) 뒤에서부터 밤나무골까지의 기다란 진흙 등성을 말한다.
새말 새말은 호암초등학교 옆 회룡천 근처에 있는 마을로, 6.25사변 후 마을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막거리 터 주막거리는 주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장수원의 주막거리를 말한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밤나무골 밤나무골은 망월천(望月川)의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로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둑골 도둑골은 일제시대의 독립군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독립군이 일본 헌병의 감시로 군자금과 식량조달이 여의치 않자 야간을 이용하여 농민들의 도움으로 식량을 조달하였는데, 당시 농민들은 넉넉하지 못한 식량을 내주면서 일제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식이 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섭섭하여 도둑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지명이 의정부내에 다섯 곳이 있다. 이 곳은 신원사가 있는 골짜기로 큰 골짜기는 장도둑골이라고 하고 작은 골짜기는 도둑골이라고 한다.
개구리바위 개구리바위는 바위의 모양이 개구리나 두꺼비의 입과 같이 만장봉 쪽으로 튀어 나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족두리 바위 족두리바위는 개구리바위 위쪽의 능선에 있는 바위로 족두리와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며, 얹혀 있다고 해서 얹힌 바위라고도 한다.
용무골(龍舞谷) 용무골은 망월사계곡의 쌍용사 밑에 있는 골짜기로 용이 놀았다는 깊은 소(沼)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암반(岩盤)만 남아 있어 물이 깊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호랑이 코배기바위 호랑이코배기바위는 용무골 왼쪽의 작은 계곡에 있는 바위로 그 모양이 호랑이 등과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바위(纛岩) 독바위는 원효사계곡에 있는 바위로 홀로 서 있는 큰 바위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이 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망월사계곡
(望月寺溪谷)
망월사계곡은 망월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망월사는 창건연대가 의정부에서 가장 오래 된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8년(639)에 해호스님이 선덕여왕의 명을 받아 창건한 것으로 신라의 서울 월성(月城)을 바라보면서 왕실의 융성을 빌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창건당시의 터는 지금의 망월사에서 서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 약수터가 있는데 도봉산에서 가장 깨끗하고 유명한 약수터라고 한다.
제주마을 제주마을은 회룡초등학교 앞에 있는 마을로 6.25사변 이후 서너채 들어서면서 당시의 마을이 제주도와 같이 물에 둘러싸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소리밭 고소리밭은 현재 회룡초등학교 부근 일대로, 일제시대에 도봉산의 화강암을 채취해 가면서 이곳에서 돌을 다듬어 이 곳이 돌밭이 되자 여기서 자란 고사리가 보통 고사리보다 작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등 진등은 연말뒤의 등성이로 바닥이 흙으로 이루어져 붙여진 이름이다.
영당(影堂) 터 영당 터는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약수골 약수골은 안말 위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로 약수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임. 현재는 체력단련장이 있다.
매바위 매바위는 약수터 위쪽에 있는 바위로 호원동에서 바라보면 매의 머리와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달리 보인다고 한다.
얹힌 바위 얹힌 바위는 매 바위 위쪽에 있으며, 바위 위에 바위가 얹혀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손으로 밀면 약간씩 움직인다고 하여 흔들바위라고도 한다.
구멍바위 구멍바위는 얹힌바위 위쪽에 있는 바위로 구멍이 뚫려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평전 안평전은 구멍바위 너머 안골에 있는 작은 분지로 안평대군과 관련이 있는곳으로 추정된다.
고인돌 고인돌은 매 바위 밑에 있으며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개석 위로 참나무가 자라고 있다.
벼락바위 벼락바위는 절터골 입구 오른쪽에 있으며, 벼락을 맞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바위가 쪼개져 있다.
절터골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 있는 폭포를 절터폭포라고 한다. 또한 폭포 아래 삼층바위가 있다.
옥수골 이성재 옆의 계곡으로 물이 맑고 깨끗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억수골이라고도 불린다.
병문안(兵門案) 이성재 아래쪽으로 예전에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성(二城)재, 삼성(三城)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석거리 숙종 때에 세워진 남원 권씨의 비석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성(二城)재 병문안 북쪽 능선에 돌로 성을 쌓은 흔적이 있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 봉화대도 있었다고 한다.
무지치 안평전 너머 선녀바위 위 골짜기로 골이 험해서 사람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선녀바위 회룡사에서 무지치로 올라가는 골짜기에 있으며, 큰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약 100m 정도의 암반이 드러나면서 비가 오면 그 위로 폭포가 흐르는데 그 경치가 좋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나무골 무학골 오른쪽 골짜기로 문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골 배나무골 너머 동쪽 골짜기로 무학굴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골짜기에는 이성계가 왕이 된 후 무학대사를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돼지바위가 있다.
춘추좌전과
효경을 간행한
집터
1635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예순비구니가 『춘추좌전』과 『효경』을 직접 번역하여 국문으로 언해를 만들어 출판한 곳이다. 예순비구니는 녹양동에서 이귀의 딸로 태어나 김자겸에게 출가하였다가 그의 죽음으로 회룡사의 여승이 되어 불교에 귀의하였다.
사기막 회룡사 앞 골짜기로 사기 파편이 많이 출토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회룡골 회룡사 입구에 있는 마을로, 회룡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법당골 회룡골 개울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로, 무당들이 치성을 드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병풍과 같이 생긴 병풍바위가 있으며, 위쪽에는 깨끗한 샘물이 나오는 약수터가 있다.
삼성(三城)재 무학골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사면이 바위로 되어 있어 적군이 올라 올 수 없는 지형이며 500명 내지 700명의 군사가 은신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이다.
굉암 삼성재에서 직선으로 100m정도 아래쪽에 있으며, 작은 바위 위에 큰 바위가 얹혀 있다. 바위 뒤쪽으로는 넓은 공간이 있으며 그곳에서 소리를 들어보면 먼 곳의 소리까지 들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위에 굉암에서 떨어져 나간 바위가 있는데 거북 모양으로 생겨서 거북바위라고 한다.
범굴 일명 백인굴 또는 박쥐굴이라고도 한다. 10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굴이라고 하여 백인굴이라고도 하고, 박쥐가 살았다고 하여 박쥐굴로도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말 우왕 1년 봄 이성계가 아직 등극하기 전 무학대사와 함께 이 산에 와서 대업경륜을 위한 기도를 3년이나 올렸다고 한다.
도끼바위 호암사 가기 전 오른쪽 계곡 밑에 있으며, 일명 메아리바위라고도 불린다. 이 도끼바위는 바위의 반이 잘려져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이 바위를 자를 당시 바위에서 피가 나왔다고 한다.
너러바위 너러바위는 일명 노루바위라고도 하며 삼성재 아래에 있는 넓적한 바위로 마을사람들이 이 바위 앞에서 빨래를 한 후 옷을 바위에 널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등 범굴과 회룡굴 중간에 있는 얕은 등성이로, 찰 진흙으로 되어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등 아래쪽에는 외미가 있다.
외미 갱개 옆의 마을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만 거주하였고 이들의 묘가 마을 뒷산에 있어서 왜묘라고 부르다가 변음되어 외미가 되었다고 한다.
갱개 회룡골에서 외미 앞으로 흐르는 개울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회룡골에서 구바위소까지 흐르던 회룡천의 흐름을 바꾸어 다시 개울을 내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좌(殿座)마을 전좌마을은 회룡골 입구 마을로서 조선왕조 개국 초 왕자의 난으로 상심한 태조가 함흥으로 간 후 돌아오지 않다가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이에 태종이 이곳까지 마중나와서 부자가 상봉하게 되었는데 그 때 임금이 좌정하던 자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일설에서는 이성계가 왕이 된 후 무학대사를 만나러 왔다가 쉬어 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전좌마을 옆의 얕은 고개를 설개고개라고 하는데, 일본에 대한 한이 서려서 서럽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개골 범골마을 앞 능선 너머에 있으며, 졸개골이라고도 불려진다.
김구 석굴암 김구 석굴암은 회룡사 서쪽에 있는 천연 석굴로 백범이 상해로 망명하기 전에 한 때 피신하였던 곳으로 광복 후에도 이곳에 자주 들러 소요하며 고금을 회상하곤 하였다고 한다. 1949년 6월 26일 오후 3시에 석굴암에서 백범을 모시고 “石窟庵 佛 戊子 仲秋 遊此 金九(석굴암 불 무자 중추 유차 김구)”라는 명문 제묘식을 가질 예정이였으나 그 날 백범이 암살되어 서울에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의정부에서는 선생의 피 묻은 조끼 조각을 시신으로 삼아 당시 양주초등학교 교정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이곳 석굴암 앞에 안치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석굴암에 선생의 위패를 모셨으며 이곳을 백범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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