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전통
- 지명유래집
- 송산동
송산동
송산동(松山洞)
송산동은 용현동(龍峴洞), 고산동(高山洞), 산곡동(山谷洞), 민락동(民樂洞), 낙양동(樂陽洞) 등 5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는 행정동이다.
송산동이라는 지명은 송산(松山) 조견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여 새왕조의 부름을 여러번 받았으나 벼슬을 버리고 이 곳에서 한거(閑居)하였다고 한다.
동(東)과 남(南)으로는 남양주시 별내면(別內面), 북(北)으로는 포천군 소흘면(蘇屹面), 북서(北西)로는 자금동(自金洞), 서로는 장곡동(長谷洞)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면적은 26.94㎢로 시역의 33%를 차지하고 있다.
용현동 (龍峴洞)
용현동은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시북면(柴北面) 어룡리(魚龍里), 탑석리(塔石里), 양현리(陽峴里)와 둔야면(芚夜面) 둔야1리(芚夜1里)를 합하여 시둔면(柴芚面) 용현리(龍峴里)로 개칭하였다가 1964년 5월 8일 「의정부시의명칭과구역에관한조례」를 개정 공포(조례 제19호)하여 동년(同年) 6월 1일 동제(洞制)가 실시되면서 용현동이 되었다.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테이블을 보실 수 있습니다.
어룡굴(魚龍) | 어룡굴은 마을 뒤편에 효자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그 앞에는 부용천(莩蓉川)이 흘러 중랑천(中浪川)에 이르고, 그 산의 모양이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으로 마치 용이 누워서 부용천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부용천의 물고기가 용이 된 후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다가 승천하지 못하고 그대로 산이 되었다고 한다. 물고기가 용이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
덧개울 | 덧개울은 낙양동 곤제(昆弟)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고산동·산곡동·민락동쪽에서 내려오는 물이 금오동사무소 뒤 축석으로부터 내려오는 물과 합쳐지는 개울로 마을 가장자리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등 | 진등은 어룡굴에서 덧개울로 넘어가는 등성이로 바닥이 진흙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효자봉(孝子峰) | 효자봉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와 관련된 지명이다. 정문부는 부친상을 당하자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또한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외읍을 청하여 노모를 봉양하였다. 그후 조정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부친의 묘가 있는 어룡마을에 은거하였다. 이 곳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기려 어룡굴 뒤에 있는 봉우리를 효자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묘는 효자봉 기슭에 있으며 그 옆에 신도비가 있다. |
무자봉(無慈峰) | 무자봉은 효자봉(孝子峰) 아래 봉우리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정문부가 무고로 말미암아 이괄의 난과 관련되었다하여 옥사(獄死)하자 이 고장사람들이 너무 애처로워 왕이 자비심이 없다고 하여 무자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
승지골(承旨谷) | 승지골은 어룡굴에서 효자봉으로 오르는 골짜기로, 승지(承旨)를 지낸 분의 산소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한위골 | 한위골은 어룡굴에서 승지골을 오르는 왼쪽 골짜기로 청주 한(韓)씨네가 오래 살아서 한씨가 사는 위쪽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기단이골 | 기단이골은 효자봉 정상까지 기다랗게 뻗는 골짜기로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좁은골이라고도 부른다. |
참나무백이 | 참나무백이는 안산모탱이 또는 참나무모탱이라고도 하는데, 예전부터 참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앞고래 | 앞고래는 어룡굴 앞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곳에는 새논, 두목논, 우렁논 등이 있다. |
돌다리보(洑) | 돌다리보는 현재의 오목리 앞에 돌다리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곳에 있는 논을 돌다린논들, 돌다리계라고 한다. |
샘막굴 | 샘막굴은 참나무백이 오른쪽의 작은 마을로 어룡굴과 막굴사이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막굴 | 막굴은 무자봉 밑의 마을로 뒤가 막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갓굴 | 갓굴은 방아다리 오른쪽의 마을로, 막굴의 가장자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방생이 | 방생이는 무자봉 아래쪽에 있는 연못으로 이 곳에다 물고기를 방생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정렬(貞烈) | 정렬은 대장골, 장골, 빼벌, 수돌고개, 서라리고개, 외끝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의병들을 한데 모아 묻은 말무덤이 있다. 이 말무덤은 우관전투 때 죽은 의병들을 묻은 것으로 보이는데 우관전투는 경상도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이 수락산 근방에서 왜적과 싸워 승전한 전투이다. |
길렬 | 길렬은 정렬 아래쪽으로, 원산에서 서울로 드나들던 길이었다. 현재 송산동 사무소가 있는 근방이다. |
방아다리 | 방아다리는 길렬 아래쪽으로,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대장골 | 대장골은 현재 영석고등학교 부근 일대로,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으로 보인다. |
볕고개(陽峴) | 볕고개는 햇볕이 잘 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고인돌 | 고인돌은 대장골과 장골 사이의 등성이에 있으며, 그 등성이 끝에 큰 나무가 있어서 장목동(樟木洞)이라고도 불렸다. |
장골 | 장골은 현재 보충대가 있는 곳으로 정확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으로 보인다. |
탑석(塔石) | 탑석은 어느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 수 없으나 탑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나가는 사람마다 자기 소원을 빌고 가곤 했다고 한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능너머 | 능너머는 탑석 뒤로 지금은 흔적이 없으나 석물(石物)을 잘 갖춘 옹주의 묘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송장웅덩이 | 송장웅덩이는 탑석 앞 용두머리에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사람들을 왜병들이 이곳에 버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굴치기들 | 굴치기들은 탑석의 진등 끝에서 부용천(芙蓉川)까지의 약 만여평의 논으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고, 현재는 현대아파트가 있다. |
성골(城谷) | 성골은 정확한 지명유래는 알 수 없으며, 이 곳 주위는 지금도 땅을 파면 기왓장과 주춧돌이 출토되고 있다. |
만가대(萬家岱) | 만가대는 집이 많았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집을 더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집이 많이 들어섰다고 하여 만가대(滿家垈)였는데, 지금은 만(滿)자가 바뀌어 만가대(萬家垈)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양주목 호구장 교지(楊洲牧 戶口帳 敎旨)」에 의하면 박씨 일가가 누대에 걸쳐 살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이 곳이 둔야1리(芚夜1里)였음을 알 수 있다. |
여우골 | 여우골은 성골의 오른쪽 골짜기로 바위와 굴이 많다. 그 굴에서 예전에 여우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둔야면사무소 (芚夜面事務所)터 |
둔야면사무소 터는 현재 용현동 496번지로 군 의무대가 주둔해 있다. 그 앞에 공고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부대가 주둔하면서 길을 돌려 당내미고개로 길이 나 있고, 그 왼쪽으로는 시북면 면사무소와 수령이 동일한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 아래쪽 모퉁이는 참나무모퉁이라고 한다. |
풀무골 | 풀무골은 여우골 너머 골짜기로 예전에 대장간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강가마골 | 강가마골은 성골 뒤의 제일 큰 골짜기로, 골은 넓으나 너무 길고 가파라서 올라갈 수 없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절터골 | 절터골은 골안의 왼쪽 아래 절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은 아래절골과 윗절골로 나뉜다. |
골안 | 골안은 여우골, 강가마골, 큰골, 작은골의 안쪽에 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긴골 | 긴골은 골 안에서 제일 긴 골짜기를 말한다. |
된내미고개 | 된내미고개는 고개가 험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암동에서는 이 고개가 내려다보면 마치 배와 흡사하다고 하여 배내미고개라고 부른다. |
함박바위 | 함박바위는 오리봉 아래쪽에 있는 함지박 모양처럼 생긴 바위를 말한다. 자금동에서는 이 바위를 족두리 바위라고 부르며, 거문돌에서는 할미봉이라고 부른다. |
할아버지바위와 할미바위 |
할아버지바위는 긴골 쪽으로 할미바위는 이은골 쪽으로 마주 바라보면서 정답게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수당할머니바위와 국수당할아버지바위라고도 한다. |
부엉바위 | 부엉바위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미바위 아래 긴골 능선에 있는 바위로 예전에 이 바위에서 부엉이가 항상 울었다고 하여 부엉이바위라고 불렸다. |
이은골 | 이은골은 긴골과 은선동 사이에 위치한 골짜기로 끊어질 듯 이어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돼지골 | 돼지골은 이은골에서 교도소로 넘어 가는 골짜기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관대박골 | 관대박골은 이은골 아래 골짜기로 사모관대를 쓴 것과 같은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재집골 | 재집골은 교도소 앞 논위의 골짜기로 예전에 집이 있었는데 불이 나서 집을 다시 지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앞의 논을 재집골 논들이라고 부르는데 넓이가 6천여평 정도가 된다. |
막은골 | 막은골은 교도소뒤쪽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로 가파라서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무내미 | 무내미는 떼쟁이골에서부터 만가대 국수당개울까지 흐르는 물이 흐르지 않고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떼쟁이골 | 떼쟁이골은 막은골 위쪽 골짜기로 잔디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절터 입구 | 절터입구는 윗절터와 아랫절터로 올라가는 골안의 입구를 말한다. 이 곳에도 부엉이가 항상 울었다는 부엉바위가 있다. |
큰골 | 큰골은 만가대 뒤쪽 골짜기로, 큰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작은골 | 작은골은 만가대와 성골뒤의 골짜기로 작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국수당개울 | 국수당개울은 긴골에 있는 할머니바위와 할아버지바위(국수당할머니바위와 국수당할아버지바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개울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물레방아골 | 물레방아골은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물레방아골을 조금 지나 개울 오른쪽에 마을 사람들이 산 치성을 드리던 노구메터가 있다. 지금도 이 곳에서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다. |
벼락바위 | 벼락바위는 만가대 뒤 군부대 안에 있는 바위로 벼락을 맞은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안개울 | 안개울은 국수당개울 아래쪽에 있으며, 이 안개울과 국수당개울 사이에 만가대가 형성되어 있다. |
이스락골 | 이스락골은 만가대에서 작은골과 큰골을 가는 길에 있는 논과 밭으로 곡식이 잘 익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독박골 | 독박골은 큰골과 작은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이 곳에는 말박골·좁은골·벽장골·굳대바지골 등이 있다. 굳대바지골은 무당들이 치성을 드리던 골짜기이며, 벽장골은 옛 가옥의 벽장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좁은골은 골짜기가 좁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말박골은 말 발자국 흔적이 있는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박골에는 독바위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던 곳이라고 한다. |
쇠파리봉 | 쇠파리봉은 독바위골 위에 있는 봉우리로 쇠파리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을 기점으로 강가마을·큰골·작은골과 굳대바지골·좁은골·벽장골·독박골·말박골이 형성되어 있다. |
담안밭 | 담안밭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이 곳과 옥장터 사이의 작은 등성이를 동네너머라고 한다. |
옥장터 | 옥장터는 예전에 죄인을 가두던 옥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사태도랑 | 진사태도랑은 강가마골·여우골에서 성골을 거쳐 흘러내리는 도랑을 말하는데, 이 옆에 둔야면사무소 터에 있던 느티나무가 지금도 서 있다. |
멍에밭 | 멍에밭은 현재 군 보충대 앞의 밭으로, 멍에를 얹은 소들이 이 곳에서 많이 쉬어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수락골고래 | 수락골고래는 진사태 도랑 주위와 만가대 앞에 있는 논으로 수락산 골짜기가 있는 논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고산동(高山洞)
고산동은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 내동면(內洞面) 고산리(高山里)·입암리(笠岩里)를 합하여 별내면(別內面) 고산리(高山里)로 개칭하였다가 1980년 4월 1일 의정부시(議政府市)로 편입되면서 고산동이 되었다. 고산동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 부근에 있는 야산이 높아서 이 곳을 높은 뫼라고 칭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테이블을 보실 수 있습니다.
높은뫼(高山) | 높은뫼는 수락산에서 길게 내려오는 등성이로 위쪽으로 오리가 많이 날아 왔다는 오리둑이 있었다고 한다. |
---|---|
장승거리 | 장승거리는 1913년부터 1927년까지 의정부에서 퇴계원으로 가능 길을 신설하면서 생긴 거리로, 이 근방 사람들이 장승을 세워 놓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장승은 남아 있지 않다. |
막은골 | 막은골은 높은 뫼 왼쪽의 골짜기로 가팔라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양지마을 | 양지마을은 높은 뫼 양지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앞의 논을 양지말고래라고 불렀으며, 지금은 교도소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이전하였다. |
도림(桃林)뫼 | 도림뫼는 양지말에서 거문돌로 가는 산등성이로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있는 마을을 도림동(桃林洞)이라고 하였다. |
응달마을 | 응달마을은 도림뫼의 음지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빼뻘 | 빼뻘은 배나무가 너무 많아서 붙여진 이름(梨坪)이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시언(李時言)이 이끈 우관전투 때 백병전을 하던 곳으로 변음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말무덤 | 말무덤은 빼뻘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의 거리에 있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들을 한 곳에 묻은 무덤을 말한다. 이러한 말무덤이 의정부시에 4군데 정도 있다. |
회유(回流)물 모퉁이 | 회유물모퉁이는 빼뻘에서 거문돌로 가는 모퉁이로 고산동과 산곡동의 경계를 이룬다. 장마에 산등성이가 갈라져서 물이 거문돌로 흐르게 되면서 돌아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원머루(遠隅) | 원머루는 예전에 서울에서 수락산 고개를 거쳐 포천을 가려면 멀리 돌아가야 될 만큼 먼 모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곳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 원우(遠隅)라고 쓰게 되었다. 또한 일설에는 이 모퉁이를 지나야 원님의 산소와 양마산소로 갈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곳에는 6.25사변이후 군부대가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
뱅골모탱이 | 뱅골모탱이는 원머루에서 오목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현재 도로가 개설중이다. |
양마산소 | 양마산소는 양모양의 망부석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원님의 산소라고도 한다. |
황새바위 | 황새바위는 1960년대까지 만해도 황새들이 이 바위위에서 서식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 모양도 황새와 같이 생겼다고 한다. |
아기동박골 | 아기동박골은 황새바위 아래로 아기가 나왔다는 아기동박굴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부용봉 | 부용봉은 이 곳에서 부용이라는 기생이 술장사를 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빈장(賓將)대 | 빈장대는 부용봉 위쪽의 편평하게 넓은 곳으로 어느 전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장(敵將)이 서로 만난 자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구전(口傳)으로 봉화대였다고 전해진다. |
맥재보(洑) | 맥재보는 민락동의 중부들로 흐르던 보(洑)로서 의정부에서 최초로 수리를 이용한 곳이다. 이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그 주위에 보리를 많이 심은데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
광쟁이보(洑) | 광쟁이보는 용현동 일대의 물을 대던 보(洑)로, 이 광쟁이보와 맥재보를 한식전에 농사를 준비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손보던 행사가 매우 컸다고 한다. |
광쟁이벌 | 광쟁이벌은 광장과 같이 넓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광쟁이보, 광쟁이개울, 광쟁이다리가 있다. 광쟁이다리는 그 앞에 장승거리가 있어서 장승거리 다리라고도 한다. |
정자마을 | 정자마을은 예전에 이 마을 어귀에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노는 정자터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서 문집에 보면 송정동(松亭洞)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
복혜(服鞋) 터 | 복혜터는 옷과 신발을 빨던 예전의 빨래터를 말한다. |
윗방굴 | 윗방굴은 부용봉 아래의 편평한 곳으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이 곳에서 동쪽으로 미륵사라는 절이 있다. |
샘말 | 샘말(사이말)은 정자마을과 능안마을 사이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샘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한다. |
불콩논들 | 불콩논들은 정자마을 앞의 논들로 이 곳의 주인이 흉년이 나자 물에 불린 콩세 양재기와 이 논을 바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사북밭 | 사북밭은 현재 고산초등학교 자리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능안말 | 능안말은 고산초등학교 부근의 마을로 1468년 세조(世祖)가 승하하자 지사(地師)가 능자리를 물색하기 위하여 신곡동의 능골을 거쳐 이 곳까지 와서 명당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그 때 지사가 여기에 능자리를 삼을 것을 마음먹었으나 광릉이 더 좋은 땅이라고 하여 그 곳으로 결정하자 이름만 능안말로 남게 되었다. |
송이봉 | 송이봉은 능안말 뒤의 산봉우리로 송이버섯이 많이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 모양도 송이버섯과 같이 생겼다. |
안산고개 | 안산고개는 송이봉의 아래쪽 고개로 산이 조그맣고 둥글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은행나무고개 | 은행나무고개는 능안말에서 여의고개로 넘어가는 고개로,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아래구석말 | 아래구석말은 신숙주(申叔舟)묘 뒤쪽에 있는 마을로 신숙주의 후손들의 묘가 많이 있다. 그 후손 중의 하나로 양주목사를 지낸 신경락(申景洛 )묘가 있다. |
월유(月遊) | 월유동산은 월배원(月排園)이라고도 하며, 달맞이를 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안산 | 안산은 아래구석말 앞의 둥글고 조그마한 산으로 마을의 재앙을 막아 주고 편하게 해준다 한다. |
바대논들 | 바대논들은 월유동산 앞의 논들로 바다 같이 넓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논들은 노구논, 길섶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길따배기논, 기다랗게 생겨서 붙여진 시렁떼배미논 등이 있다. |
바위백이논들 | 바위백이논들은 논 안에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안고래 | 안고래는 구석마을 안에 있는 논으로 마을 안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여의(如意)고개 (여우고개) |
여의고개는 이 고개를 넘으면 마음먹은 대로 뜻이 잘 풀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흔히 여우고개로 불린다. |
기차바위 | 기차바위는 멀리서 보면 기차와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는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 그 구멍으로 궁말이 보이는데 그 구멍을 막아 놓지 않으면 궁말의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늘바위라고도 한다. |
골안 | 골안은 신숙주묘 너머 왼쪽 골짜기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쇤굴고개 | 쇤굴고개는 윗구석말에서 쇤굴로 가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곳에는 병풍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소리를 치면 메아리가 울린다고 하여 메아리방천고개라고도 한다. |
삼귀고개 | 삼귀고개는 윗구석말에서 민락도의 삼귀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귀마을에서는 수리고개라고 부른다. |
부정골 | 부정골은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이 옆에 이서(李曙)의 묘가 있다. 이서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정사공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전사하였다. |
딴뚱우리 | 딴뚱우리는 부정골 옆에 있는 조그마한 분지를 말한다. |
구석말(構石洞) (구성말(九星洞)) |
구석말은 세종(世宗)의 막내아들인 운림도정(雲林都正)의 후손들이 와서 살면서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로 들어가거나 나올 때는 입구에 있는 구석(構石, 푯돌백이)이라는 돌을 딛고 말을 타거나 내려서 걸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구석말이 변음되어 구성말(九星洞)이라고도 한다. 또한 600년 정도된 은행나무에 황새가 많이 날아와서 황새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이 마을에는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묘와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묘, 완성군(完城君) 이기축(李起築)의 묘 등 당대에 명성을 날렸던 명인들의 묘가 있다. |
안산 | 구석마을에는 두 개의 안산이 있는데 신숙주의 묘를 기준으로 왼쪽은 윗말안산이고, 오른쪽은 아랫말안산이다. 신숙주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신숙주는 6대왕을 보좌하면서 사국(史局)을 맡아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등을 편찬하였고『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 총재관을 맡았다. 세종(世宗)때는 집현전 학사로 임금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소장학자로서 촉망이 높았으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하여 후세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성종(成宗)의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옻밭모퉁이 | 옻밭모퉁이는 윗구석말에서 가잿말로 가는 산모퉁이로, 옻모퉁이로, 옻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벼락바위 | 벼락바위는 가잿말 입구 왼쪽 능선에 있는 바위로 벼락을 맞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낭위 | 낭위는 가잿말에서 갓바위로 가는 길에 500m 정도의 낭떠러지가 둘러 있는데 그 위를 낭위라고 하며, 그 아래를 낭아래라고 한다. |
당그뫼골 | 당그뫼골은 낭위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치성을 드리던 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임춘굴골 | 임춘굴골은 나주 임씨 선조의 묘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세귀밭 | 세귀밭은 갓바위에서 민락동의 삼귀마을로 가는 길에 있는 삼각형의 밭을 말한다. |
건릉골 | 건릉골은 임춘굴의 왼쪽 골짜기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서라리고개 | 서라리고개는 임진왜란 당시 이 고개에서 조총을 가진 왜병과 돌팔매로 맞선 의병이 왜병을 이길 수 없자 서럽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느티나무산 | 느티나무산은 서라리고개 오른쪽으로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
담뒤밭 | 담이라고 하는 것은 토성(土城)과 관련된 지명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불당골 | 불당골은 갓바위 뒤의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용암산(龍岩山) | 용암산은 본래는 용암산(鎔岩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갓바위(笠岩里) | 갓바위는 남양주시 용암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용암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바위가 갓모양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토끼마당 | 토끼마당은 용암산에서 광릉으로 가능 세 갈래 길가에 있는 분지로 토끼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형제바위 | 형제바위는 바위두개가 절을 하듯이 사이좋게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갓바위마을 | 갓바위마을은 윗갓바위마을과 아랫갓바위마을로 나뉘며, 용암산의 갓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고인돌 | 고인돌은 윗갓바위마을과 아랫갓바위마을 사이의 길가에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
진등 | 진등은 불당골에서 서라리고개까지의 등성이로 바닥이 진흙으로 이루어져 붙여진 이름이다. |
도당산(제터골) | 도당산은 마을사람들이 산 치성을 드리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제터골이라고도 한다. |
호랑이굴 | 호랑이굴은 긴등 왼쪽골짜기에 있으며, 호랑이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긴등 | 긴등은 용암산 상봉에 있는 등성이로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그 골짜기를 긴등골짜기라고 한다. |
짧은등 | 짧은등은 긴등의 오른쪽 등성이로 짧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아래쪽에 나무를 하러 온 사람들이 쉬어 가던 이터개라는 곳이 있다. |
된봉 | 된봉은 긴등의 왼쪽 등성이로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별윗개(벼루개) | 별윗개는 별 위처럼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버덩 | 버덩은 윗갓바위마을에서 용암리로 가는 길에 넓은 분지로 한문표기로는 번등(樊登) 또는 번평(樊坪)이다. 이 곳에 검은바위가 있다. |
안산골 | 안산골은 조그맣고 얕은 산인 안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감자골 | 감자골은 골짜기의 생김새가 감자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당그뫼고개 | 당그뫼고개는 윗갓바위마을에서 아랫갓바위마을 사이의 조그만 고개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능너머 | 능너머는 윗갓바위와 아랫갓바위 앞에 있는 자그마한 산으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말무덤 | 말무덤은 임진왜란 당시 서라리고개에서 전사한 의병들을 한꺼번에 묻은 무덤으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
앞골(앞고래) | 앞골(앞고래)은 윗갓바위 앞의 논으로 마을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개강주고래 | 개강주고래는 담뒤밭 앞의 논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상장논들 | 상장논들은 아랫갓바위 아래의 논들로, 토질이 좋아서 쌀이 잘 여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가잿말 (嘉座洞, 可座洞) |
가잿말은 효령대군의 후손인 의원군(義源君) 락이 제주도로 유배갔다가 인조반정(1623)으로 방면되어 안식처로 삼은 곳으로, 살기가 좋고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홈다리 | 홈다리는 가잿말 입구에 있던 나무다리로 큰 나무를 소여물통처럼 홈을 파서 만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쌀광 | 쌀광은 홈다리에서 300m정도 아래에 있는 샘으로 쌀알만한 크기의 모래가 솟아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위마전(衛馬田) | 위마전은 가잿말과 골말 입구에 있는 밭으로 활터에서 훈련을 하는 병사들이 말을 매어 놓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활터 | 활터는 위마전 위쪽 등성이 너머로 얼마전까지 만 해도 이 곳에 활을 쏘던 대석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
좁은골 | 좁은골은 골말 바로 너머로 골짜기가 좁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치갈이밭과 돌밭이 있는데, 치갈이밭은 좁고 길어서 한 방향으로만 밭갈이를 할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등 | 진등은 골말고개에서 활터·위마전으로 이어지는 긴 등성이로, 바닥이 찰진흙으로 이루어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쉼터 | 쉼터는 진등 북쪽 등성이에 있으며, 나무꾼들이 나무를 해오다가 쉬어 가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갈무봉(竭武峰) | 갈무봉은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며, 이 봉우리 밑에 과녁을 두고 활터에서 활을 쏘았다고 한다. |
두루봉(周峰) | 두루봉은 갈무봉의 동북쪽 봉우리로 산봉우리의 모양이 둥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생김새가 갈무봉과 매우 흡사하다. |
고래당 | 고래당은 두루봉 아래에 있는 논으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옷물약수터 | 옻물약수터는 승지골 아래에 있는 약수터로 옻이 오른 사람이 이 물을 마시면 낫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도 이 앞에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승지골 | 승지골은 옻물약수터 위의 골짜기로 도승지(都承旨)를 지낸 사람의 묘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된매기 | 된매기는 갈무봉의 왼쪽 모퉁이로 오르기 힘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배양현(培養峴) | 배양현은 왕재 아래 쪽에 있으며,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배양현이 변음되어 뱀굴이라고도 한다. |
뱀굴모퉁이 | 뱀굴모퉁이는 뱀굴(배양현)로 들어가는 모퉁이를 말한다. |
장수우물 | 장수우물은 배양현의 오른쪽 계곡에 있으며, 우물위에 있는 구기자나무의 뿌리가 물속으로 뻗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장수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말고개 | 중말고개는 산곡동과 고산동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마을과 마을의 중간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마당바위 | 마당바위는 장수우물에서 500m정도 위쪽에 있는데 바위의 모양이 넓다란 마당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고라갱이골 | 고라갱이골은 마당바위 앞 골짜기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굴바위 | 굴바위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주민들이 은신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울자 발각될까 두려운 나머지 그 아이와 어머니를 내쫓았으나 결국은 모두 발각되어 왜병에게 몰살한 곳이라고 전해진다. |
불개미등 | 불개미등은 왕재에서 동무봉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등성이로, 불개미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동무봉(東武峰) | 동무봉은 갈무봉이나 활터와 마찬가지로 군사훈련을 하던 곳으로 추정되며, 이 곳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산곡동, 북쪽으로는 고산동이 된다. |
왕재 | 왕재는 굴바위 동쪽 위로, 이성계(李成桂)가 전좌마을에 앉았다가 이 곳에 올라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왕이 군사훈련을 시찰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
산곡동 (山谷洞)
산곡동은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내동면(內洞面) 산곡리(山谷里)와 별비면(別非面) 흑석리(黑石里)를 합하여 별내면(別內面) 산곡리(山谷里)로 개칭하였다가 고산동과 함께 1980년 4월 1일 의정부시(議政府市)에 편입되면서 산곡동이 되었다. 산곡동이라는 산골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일설에는 이 곳에 있는 충신열녀(忠臣烈女)와 관련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안산김씨(安山金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가 강원도 금성부 산곡간으로 피난하였는데, 갑자기 왜병을 만나자 김씨는 품고 있던 은장도로, 신씨는 물에 투신하여 각기 자결하였다. 1592년 6월 6일의 일로 이듬해에 두 동서가 함께 정절을 지켰다고 하여 충신열녀라는 정여(旌閭)를 내리고 당시 영의정이던 이호민(李好閔)이 쌍절비문(雙節碑文)을 지어 내렸다. 이후 마을 이름을 그들이 자결한 곳인 산곡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테이블을 보실 수 있습니다.
거문돌 | 거문돌은 조선시대에는 東幕(동막)으로 불렸다. 동막은 이 마을 동쪽에 더운 물이 땅에서 솟아올라서 그 물로 사람들이 막을 세워 놓고 목욕을 하였다는 온두막골(溫逗幕谷)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후 묵현(默峴)이라고도 불렸다. 묵현은 거문돌위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가 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흑석동(黑石洞)일고 부르고 있다. |
---|---|
국수당할미봉 | 국수당할미봉은 상봉과 오리봉의 중간에 있는 봉우리로 거문돌에서는 함박바위봉이라고 부르고, 자금동에서는 쪽두리봉이라고 부른다. |
가마솥골 | 가마솥골은 거문돌에서 꽃마루재를 넘어가기 전 왼쪽에 있는 골짜기로 숯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퉁두란 이씨 묘 | 퉁통두란 이씨 묘는 능안과 꽃마루재 사이의 능선에 있으며, 퉁두란 이씨는 고려 공민왕때 귀화하여 이(李)씨의 성과 청해(靑海)를 본관으로 하사받아 이두란(李豆蘭) 또는 이지란(李之蘭)이라고도 하며, 조선건국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
올챙이골 | 올챙이골은 수돌고개와 불통골 사이의 작은 골짜기로, 임진왜란 우관전투 당시 왜병들이 많은 수로 돌격해 오는 것이 마치 개구리와 같고 우리 의병들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올챙이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진등 | 진등은 빼뻘과 거문돌의 경계가 되는 등성이로 능안에서부터 산줄기가 길게 뻗어있다. 바닥이 진흙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능안 | 능안은 세조의 능자리와 관련된 지명으로 거문돌에서 은선동 올라가는 길에 있다. |
꽃마루재 | 꽃마루재는 거문돌에서 은선동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꽃이 항상 일찍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뭉어리골 | 뭉어리골은 거문돌에서 치마바위로 올라가는 골짜기로, 이 곳에 예전에 뭉어리라는 고기도 아니고 도마뱀도 아닌 이상한 동물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
은선동(隱仙洞) | 은선동은 수락산의 기암괴석이 萬壑千峰(만학천봉)을 이룩 起伏轉回(기복전회)하여 이룬 계곡으로 옛 사람들이 신선이 놀다가 자취를 감춘 곳이라고 하여 암벽에다 은선동이라고 음각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있는 폭포를 은선동 폭포라고 한다. |
치마바위 | 치마바위는 안산 위쪽에 있는 바위로 주름을 잡은 치마와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사기막 | 사기막은 마당바위로 넘어가는 오른쪽 능선에 있으며, 예전에 이 곳의 백토로 사기를 만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주전(鑄錢) 터 | 주전터는 거문돌에서 마당바위를 가다가 사기막을 약 500m 정도 못 올라가서 오른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서 엽전이 나왔다고 한다. 엽전을 만들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數突(수돌) 고개 | 수돌고개는 임진왜란 우관전투 당시 빼뻘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 이 고개로 많은 왜병들이 일시에 몰렸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곳 옆에는 의병들이 분해서 자결하였다는 분통골이 있다. |
안산 | 안산은 거문돌에서 동남쪽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산으로 둥글고 편안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덤바위 | 덤바위라는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이 곳에는 말잔등 같이 생긴 말바위와 개구리 모양의 개구리 바위가 있으며, 바위 위로 바석이 하나 서 있다. |
술청계 | 술청계는 거문돌 입구의 길가로, 예전에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쌍절비 | 쌍절비는 임진왜란 당시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자결한 안산김씨(安山金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를 기려 세운 비석으로 두 열녀와 유질(柳秩)을 모시고 있는 정려각(旌閭閣) 안에 서 있다. |
온두막골(溫逗幕谷) | 온두막골은 거문돌 입구 왼쪽의 논에서 더운물이 솟아 올라서 사람들이 막을 세워 놓고 목욕을 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모두 논으로 개간되어 온두막이 있었던 자리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금도 수온이 따뜻해서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
좁은골 | 좁은골은 오두막골에서 남양주시 청학리로 넘어가는 골짜기로 좁고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독바위 | 독바위는 독바위마을 입구 왼쪽 능선에 있으며, 현재는 마을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던 곳으로 지금도 계단석이 남아 있다. |
피나무쟁이 | 피나무쟁이는 진등에서 수돌고개로 가는 길가에 피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앞고래 | 앞고래는 독바위마을 앞에 있는 논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등 | 진등은 독바위 뒤의 긴 능선으로 바닥이 진흙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불당골 | 불당골은 매봉재 옆 골짜기로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할미바위·할아버지바위·메주바위 | 할미바위는 불당골 뒤 능선의 동쪽으로 향해 있고, 할아버지바위는 그 너머 골짜기에서 할머니바위를 마주보고 있으며, 메주바위는 메주 모양으로 생긴 바위로 할아버지바위 위쪽에 위치한다. |
매봉재 | 매봉재는 할아버지바위·할머니바위·메주바위 위쪽의 능선 봉우리로 조선시대에 매를 날리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어두니고개 | 어두니고개는 물도랑같이 양쪽이 상당히 높고 긴 골짜기에 있는 고개로, 나무가 많아서 항상 어둡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지만, 고산초등학교가 생기기전에 고산·산곡에서 별내초등학교를 가려면 학생들이 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고 한다. |
방아다리 | 방아다리는 우래울고래에서 내려오는 물과 거문돌에서 내려오는 물이 부용천(芙蓉川)과 합쳐 흐르는 곳에서 우래울고래쪽에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살구쟁이벌 | 살구쟁이벌은 우래울고래 아래 쇠재등 끝에 있는 들로 예전에 살구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흐르는 개울을 살구쟁이개울이라고 한다. |
송아지뫼 | 송아지뫼는 쇠재등으로 넘어가는 길가 오른쪽에 있으며, 소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임진왜란 우관전투 당시 빼뻘에서 사망한 의병중 연고가 있는 사람들을 옯겨다 묻은 무덤이 20여기가 있는데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우래울고래 | 우래울고래는 쇠재등 바로 앞쪽에 있는 논들로 땅이 기름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논은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모를 내지 못한 적이 없으며, 예전에는 의정부의 논 3평을 팔아야 이 곳 논 1평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논 위에는 곡식이 잘 여문다는 상답논이 있으며 상답골(上畓谷)이라고도 한다. |
쇠재등 | 쇠재등은 양가뫼 모퉁이에서부터 송아지뫼까지의 약 1㎞의 진흙등성이다. 아래쪽에는 쇠재고개가 있으며, 맨 끝에는 살구쟁이가 있다. 쇠재등은 정자마을쪽에서 보면 마치 소머리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쇠재등의 평수는 약 3만여평이 된다. |
양가뫼등 | 양가뫼등은 쇠재등 맨 꼭대기의 등성이로 양씨네 묘가 있던 자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있는 잔돌백이에서 산꽃마을로 가는 모퉁이를 양가뫼모퉁이라고 부른다. |
산꽃마을 | 산꽃마을은 양가뫼 너머 안쪽에 있는 마을로 산꽃이 많이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샘말 | 샘말은 산꽃마을과 독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로 샘이 잘 나오는 우물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새말 | 새말은 산꽃마을과 독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로 6.25사변 이후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해게논 | 해게논은 새말과 샘말로 가는 길 아랫쪽에 있는 논으로 토질이 나빠서 농사가 잘 안되었으며, 이 논 때문에 재판 사건이 있었는데 해결이 잘 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논 주위를 해게논들이라고 부른다. |
좀바위 | 좀바위는 해게논에서 새말로 가는 왼쪽 길 옆에 있으며, 바위가 좀이 먹은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성지(城址)우물 터 | 성지우물터는 남영안 밑에 있는 우물 터로 그 위에 성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남영안(南營案) | 남영안은 예전에 군영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바로 밑에 성지우물터가 있고, 여기서 8번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동무봉과 배양현이 나온다. 이 동무봉과 마주보고 있는 것이 갈무봉이며, 갈무봉 밑에 활터가 있고, 활터 밑에 말을 매었다는 위마전이 있다. 또 뱀골 위에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를 왕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남영안의 넓이는 약 만오천여평 정도로 산등성은 가라프고 서쪽으로 성지우물 터가 있는 곳으로만 통행로가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6.25사변 때도 인민군이 참호를 파놓고 잠복하던 곳이다. |
대문바위 | 대문바위는 동무봉 앞에 있는 대문과 같이 생긴 바위를 말한다. 또한 장롱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농바위라고도 부른다. |
동무봉(東武峰) | 동무봉은 산곡동과 고산동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로 남영안에서부터 거리가 약 1㎞정도가 된다. |
형제봉 | 형제봉은 동무봉 윗쪽 능선인 불개미등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좌우로 생김새가 같은 봉우리를 말한다. 생김새가 형제와 같이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연장봉 | 연장봉은 산곡동 산1번지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햇재(햇거리) | 햇재는 동무봉 남쪽의 양지쪽을 말하며, 햇거리라고도 부른다. 햇빛이 잘 들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햇절이라는 절이 있었다고도 한다. |
안골(안고래) | 안골(안고래)는 잔돌백이마을 안에 있는 논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억간터 | 억간터는 안골에서 산꽃마을로 가는 길의 조그만 산등성이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잔돌백이(細石) | 잔돌백이는 땅을 파면 논, 밭 어느 곳에서나 잔돌이 많이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꽤 넓게 형성되어 있다. |
외재 | 외재는 잔돌백이에서 능안말로 가는 작은 고개로,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주둔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쇠쟁이벌 | 쇠쟁이벌은 쇠쟁이등 너머 저수지 아래의 들로, 이 곳에는 길마배미라는 논이 있다. 길마배미는 논의 모양이 소의 등에 얹는 길마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물덤바위 | 물덤바위는 용암산 갓바위·가잿말·구석말·뱀굴을 거쳐서 흐르는 물이 잔돌백이에서 합쳐져 흐르는 개울 안에 있는 바위로 물이 바위에 부딪혀 ㄱ자의 곡선을 이루면서 아래로 흐르게 되낟. 물이 바위에 부딪혀 꺾어져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외재다리 | 외재다리는 고산초등학교 앞에 있는 다리(현재의 산곡교)로 이 다리가 있는 개울을 외재개울이라고 한다. |
민락동 (民樂洞)
민락동은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시북면(柴北面) 민락리(民樂里)·오목리(梧木里)·삼귀리(三歸里)등 3개리를 합하여 시둔면(柴芚面) 민락리(民樂里)로 고쳐 부르다가 1964년 5월 8일『의정부시의명칭과구역에관한조례』를 개정 공포(조례 제19호)하여 동년(同年) 6월 1일 동제(洞制)가 실시됨에 따라 민락동이 되었다.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테이블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목리(梧木里) | 오목리는 예전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택지개발을 하고 있다. |
---|---|
뱀굴 | 뱀굴은 오목리에서 고산리의 원모루로 가는 길로 뱀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건너말 | 건너말은 오목리와 뱀굴사이 동산부리 너머의 마을로 오목리의 건너편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6.25사변 후부터라고 한다. |
동산부리 | 동산부리는 건너말 아래의 산등성이로 이 앞의 논들을 동산부리들이라고 하며, 이 곳으로 맥재보(洑)가 흘러들어 온다. 동산부리 남쪽 기슭에 고인돌이 있었는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
제비바위 | 제비바위는 제비와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택지개발로 남아 있지 않다. |
범바위여우굴 | 범바위여우굴은 제비바위 동쪽으로 마주 보이는 계곡이 있는 굴로, 예전에 범과 여우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위네 너구리가 많이 살았다는 너구리바위도 있다. |
우묵골 | 우묵골은 범바위 아래 오른쪽으로 삼태기처럼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를 말한다. |
뻐꾹골 | 뻐꾹골은 우묵골짜기 아래 등성이 너머로, 항상 뻐꾸기가 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가재골 | 가재골은 여우고개 왼쪽 골짜기로 가재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승지골 | 승지골은 가재골 아래 오목리와 여우고개 사이의 골짜기로 승지(承旨)를 지낸 사람의 묘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독박골 | 독박골은 오목리와 점말 사이의 앝은 고개로 독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사당고개 | 사당고개는 오목리에서 삼귀로 넘어가는 고개로, 예전에 전주 이씨의 사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점말 | 점말은 오목리 앞에 있는 마을로, 독을 굽는 가마터와 독점이 있었다고 한다. |
뒷골 | 뒷골은 점말뒤에 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능안 | 능안은 뒷골 앞의 기다란 진흙 등서이로 세조의 능자리와 관련되어 전해지는 지명으로 보인다. |
능모퉁이 | 능모퉁이는 오목리에서 삼귀로 가는 모퉁이로 그 아래 밭을 능아래밭이라고 한다. |
진등 | 진등는 개발 이전 주소로 민락동 519번지부터 522번지 일대로, 한국토지공사에서 주택단지조성을 위한 택지개발을 하면서 선사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국내의 구석기 유적과 유물은 모두 큰 하천변이나 바닷가등 해성충에서 발견되었으나 이 곳에서 출토된 유적은 처음으로 내륙지방에서 발견되었으며,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유물분포와 구석기인들의 생활범위가 휠씬 광범위 했음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은 혈암제, 가로날밀개, 세석인석핵, 흑요석제 등 모두 36점이 발굴되었다. |
석받탱이 (昔所상) | 석받탱이는 진등 아래쪽에 있으며, 물푸레나무가 많았다는 물푸레밭과 그 아래에 참나무백이가 있다. |
동안논 | 동안논은 궁말삼거리 아래 중부들에 있는 논으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콩죽한방구리논 | 콩죽한방구리논은 궁말삼거리 왼쪽 밑의 논으로 어느해 가뭄에 흉년이 들자 이 논의 주인이 이 논을 콩죽 한방구리와 바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부들 | 중부들은 오목리 앞에 있는 넓은 들로 이 곳에 있는 논은 맥재보(洑)의 물로 농사를 짓는데 장마에는 수해가 적고 가뭄에는 물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
다리목계 | 다리목계는 오목리다리 근방을 말하며, 오목리다리는 용현동과 민락동의 경계를 이루는 다리로 이 곳을 건너면 왼쪽이 중부들이고 오른쪽이 동산부리논들이다. |
오목삼거리 | 오목삼거리는 다리목계에서 오목리로 오는 길로 예전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
망부백이 | 망부백이는 석받탱이 아래로 망부석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농민들이 논농사를 지으러 다니면서 이곳에서 쉬곤 하였다고 한다. |
쇤굴 | 쇤굴은 사당고개 너머로 이곳을 거쳐 삼귀로 가게 된다.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신후곡 | 신후곡은 메아리방청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메아리방청고개 | 메아리방청고개는 큰 바위가 있어서 메아리가 울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고산동의 구석말에서는 쇤굴고개라고 한다. |
미사리봉 (美沙里峰) | 미사리봉은 메아리고개 앞의 동그란 산봉우리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작은고래 | 작은고래는 사당고개 아래 논으로, 중부들의 논에 비해 작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햇볕이 잘 들어 이삭이 제일 먼저 핀다는 해창위논이 있으며, 옥씨가 농사를 지었다는 옥가논이 있다. |
두껍바위 | 두껍바위는 사당골 밑 길가에 있는 두꺼비 모양의 바위로 전해오는 얘깅 의하면 두꺼비의 입이 놓인 방향의 마을은 흉년이 들고 꼬리쪽의 마을은 풍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간의 바위를 돌려놓으려는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옮겨져 흙속에 파묻혀 있다. |
삼귀(三歸) | 삼귀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조견(趙 )·원선(元宣)·정구(鄭矩) 등 세분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면서 이 곳에서 은거하여, 세 분의 어진이가 이 곳에 함께 돌아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송산사(松山祠)가 있는데 정조22년(1798)에 이들의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유림들이 삼귀서사(三歸書祠)라는 사당을 세워 조견·원선의 위패를 모시다가 이후 1804년에 송산사로 개칭하였고, 186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후 1996년에 발굴 복원되었다. |
독수원(獨樹) | 독수원은 삼귀마을 안에 있는 등성이로 이 곳 맨 끝은 축동과 경계를 이루는데 100여년 정도 된 소나무가 있다. |
골우물 | 골우물은 삼귀에서 구성말로 넘어가는 오른쪽 등성이인 검천골에 있으며, 등너머에 우물이 또 하나 있는데 한쪽의 물을 뜨면 다른 쪽 우물의 물이 줄어서 물길이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쇠굴고래와 새둥지논 | 쇠굴고래는 쇠굴 앞에 있는 논들을 말한다. 이 앞 길가에 새둥지논이 있는데 새둥지 같이 잡초가 너무 많아서 해마다 김을 매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
검천이골 | 검천이골은 삼귀에서 구성말로 넘어가는 오른쪽 골짜기로 흙이 검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수리고개 | 수리고개는 삼귀에서 구석말로 넘어가는 고개로, 구석말에서는 이 고개를 삼귀고개라고 하고 삼귀에서는 수리고개라고 한다. 예전에 독수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삼귀삼거리 | 삼귀삼거리는 삼귀와 본민락으로 통하는 길로, 이 옆으로 무탱이논이 있다. 무탱이논은 토질이 너무 좋아서 아무렇게나 농사를 지어도 곡식이 잘 자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앞고래 | 앞고래는 삼귀마을 앞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안에 수렁자리논이 있고 옆으로는 영자자리논과 길둑배미논이 있다. |
외끝 | 외끝은 송산사 왼쪽의 얕은 산등성이의 끝을 말하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이 곳까지 쳐들어 왔다가 들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윗가라리고래와 아랫가라리고래 |
윗가라리고래는 능안앞의 논이고, 아랫가라리고래는 송산사(松山祠) 앞의 논을 말한다. 가라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동안개울 | 동안개울은 윗가라리고래에서 아랫가라리고래 옆으로 흐르던 개울로, 수해를 입은 적이 없을 정도로 둑이 든든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공사태 | 공사태는 윗가라리고래 옆의 밭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능안 | 능안은 송산사 위쪽으로 세조의 능자리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이며, 그 앞의 논을 능앞자리논이라고 한다. |
새테미 | 새테미는 능안에서 서라리고개로 가는 모퉁이를 말하며,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쑥모루 | 쑥모루는 능안 아래에 있는 모퉁이로 쑥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
줄밤나무골 | 줄밤나무골은 삼귀 뒤의 골짜기로 줄을 맞춘 듯 밤나무가 자라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
명다리고개 | 명다리고개는 삼귀에서 갓바위로 가는 길 분지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무당이 명이 짧은 사람을 이곳에 있는 바위에 치성을 드리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패팝골 (오리나무골) | 패팝골은 명다리고개 옆의 골짜기로, 돌배나무인 패팝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문배나무가 없어지고 오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오리나무골이라고도 한다. |
사장(射場) 터 | 사장 터는 활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의정부농협 창고가 들어서 있다. 이 옆의 개울을 사장터개울이라고 하고, 그 곳의 다리를 사장터 다리라고 한다. |
너머말 | 너머말은 미락골에서 서라리고개로 가는길의 왼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입암리에 속하다가 민락동으로 편입되었다. 이 곳에 더운우물이 있다. |
가마둥지 | 가마둥지는 너머말 앞 미락골 쪽에 작은 등성이로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논 | 중논은 새테미 모퉁이와 가마둥지 사이에 있는 논으로 축동 앞에 있다고 하여 축논인데 변음이 되어 중논이라고 부른다. |
더운우물 | 더운우물은 너머마을 안에 있으며, 얼마전까지 만 해도 더운물이 나와서 겨울에 빨래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서라리 고개 | 서라리고개는 임진왜란 당시 조총을 가진 왜병과 돌팔매로 맞선 의병이 이길수 없자 서럽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진등과 할매밭 | 진등은 바닥이 진흙으로 이루어져 붙여진 이름이며, 그 옆으로 할매밭(老姑田)이 있으며, 이 곳에서 남쪽으로 100m 정도 지점에 고인돌이 있다. |
뒷골 | 뒷골은 너머말에서 용암산에서 올라가는 골짜기로 늑대가 살던 늑대굴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밑으로는 절터 샘물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던 곳이다. |
원추리골 | 원추리골은 늑대골 맞은 편에 있는 골짜기로 원추리가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너머말에서 용암산을 오르자면 늑대골과 원추리골을 지나서 오르게 된다. |
동산마을 | 동산마을은 동산 위에 집이 몇 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아랫쪽에 삼귀에서 끝과 마주하는 외끝이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이곳까지 왔다가 물러갔다고 한다. 또한 진등도 있다. |
아랫말 | 아랫말은 송산 사거리에서 민락동 방향으로 가면 개울을 건너게 되는데 그 개울을 건너면 오른쪽에 있는 마을로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섬둥지 | 섬둥지는 섬처럼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근방의 논을 섬둥지논이라 하며, 예전에 대장간이 있었다고 한다. |
독립유공자 이용재 (李用宰)의 집터 |
이용재 집터는 민락동 199번지로, 이용재는 1926년 6·10만세 운동의 격고문 및 전단 왼쇄를 담당하였다가 이 곳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
병문(竝門) 밤나무골 | 병문밤나무골은 무지랭이 입구의 오른쪽 골짜기로, 밤나무가 양쪽으로 줄지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밤동산이라고도 한다. |
행상바위 | 행상바위는 민락동에서 무지랭이 쪽으로 200m 정도 올라가면 바위로, 그 모양이 죽은 사람을 실어 가는 행상과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찬우물(冷川) | 찬우물은 행상 바위에서 100m 정도 지점의 계곡에 있으며, 물이 차고 주위의 경관이 좋아 민락동 사람들이 예전부터 신성시했다고 한다. 이 물을 마시면 부스럼이 낫는다는 얘기도 전해오며, 물이 너무 좋아서 젖물이라고도 한다. 이 곳에 관한 낙곡(樂谷) 진익한(陣翼漢)의 시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冷 泉(냉 천) 옥령지남유냉천(玉嶺之南有冷泉) 옥령 남쪽에 물이 찬 샘이 있는데 촌인목욕백병전(村人沐浴百病 ) 동네사람들은 이물에목욕하고 모든부스럼병나았네 아래추일세쌍안(我來秋日洗雙眼) 가을 햇살이 쪼이던 날 내 이 물로 두 눈을 씻으니 신골상연혼욕선(神骨爽然渾欲仙) 정신과 뼛골이 시원하기 신선이 된 것 같네 (樂谷 陣翼漢) |
작은도장굴 | 작은도장굴은 찬우물 위에 500m 정도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로, 일제시대에 독립군이 숨어 있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곳은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숨어 있던 곳이라고 전해 온다. |
큰도장굴 | 큰도장굴은 작은동장굴과 지명의 유래는 같으며,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숨어 있던 곳이고 전해진다. |
물만등 | 물만등은 작은도장굴 위쪽에 있으며, 폭포수처럼 물이 떨어져서 마을 사람들이 여름이면 이 곳에서 등에 물을 맞으며 더위를 식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도둑골 | 진도둑골은 작은 도장굴과 큰도장굴의 맨 꼭대기에 있는 골짜기로, 주위가 상당히 넓다. 독립군 의병장이 숨어있던 곳이라 진도둑골이라 불리어 졌다. |
토끼뫼 | 토끼뫼는 용암산의 얕은 등성이로 토끼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무지랭이(無至嶺) | 무지랭이는 고개를 넘어가도 인가가 없어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동유골(東幽谷) | 동유골은 새능안 동쪽에 있는 깊은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골짜기가 길어 아래 골은 아랫동유골, 위 골은 윗동유골이라고 한다. |
동유골삼거리 | 동유골삼거리는 무지랭이 밑 새능안에 있는 세 갈래의 오솔길을 말한다. 이곳에서 위로 오르면 동유골로 가게 되고, 왼쪽으로 가면 무내미로 가게 된다. |
새능안 | 새능안은 큰 동장굴·물만등·동유골삼거리·토끼뫼 밑까지를 모두 말한다. 이 장소가 광릉에 포함되는지의 여부가 논란이 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 일제시대에 독립군이 마셨다는 샘물이 있다. |
최최골(催花谷) | 최최골은 작은도장굴의 양지쪽에 있어서 봄이 오면 꽃이 제일 먼저 핀다고 하여 최화골이라고 부르다가 변음되어 최최골이 되었다. |
돌고개 | 돌고개는 무내미를 가려면 이 곳을 돌아가야 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최최골 윗쪽에 위치하며 동유골 건너편에 있다. |
유골(幽谷) | 유골은 돌고개 밑의 골짜기로 상당히 으슥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동쪽위가 동유골(東幽谷)이다. |
꼭두봉(덜봉) | 꼭두봉은 최최골의 왼쪽 봉우리로 산 치성을 드리던 곳이다. 꼭대기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주위가 넓어서 덜봉이라고도 한다. |
불당골 | 불당골은 꼭두봉 밑의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낙곡(樂谷) 진익한(陣翼漢)이 즐겨 찾던 곳이라고 한다. |
고촌(古村) | 고촌은 불당골 아래에 있는 마을로, 고려 후기에 탁씨가 와서 살았다고 전해지며, 옛집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새뫼 | 새뫼는 낙곡(樂谷) 진익한(陣翼漢)의 후손 진연걸(陣延杰)이 이 곳에서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부모의 산소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덕수봉(德壽峰) | 덕수봉은 비단이골의 봉우리로 덕묘봉(德廟峰)이라고도 하며, 지명의 유래는 알수 없다. |
돌고지부리 | 돌고지부리는 민락골에서 포천을 가려면 이 곳을 돌아서 옥재로 넘어가야 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낙양동(樂陽洞)
낙양동은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 시북면(柴北面) 곤제리(昆弟里)·양지리(陽地里)·궁촌리(宮村里) 등 3개리를 합하여 낙양리(洛陽里)로 고쳐 부르다가 1964년 5월 8일 「의정부시의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를 개정 공포(조례 제19호)하여 동년(同年) 6월 1일 동제(洞制)가 실시됨에 따라 낙양동이 되었다. 낙양리라는 지명은 태종(太宗)의 총애를 받던 조말생(趙末生)이 곤제(昆弟)에 자리를 잡고 서울 원남동에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꽃동산을 곤재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하루는 무학대사가 이곳에 들렀다가 보고 이것이 마치 중국의 낙양과 같다고 하여 낙양화원이라고 이름 지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모바일환경에서는 좌우로 이동하여 테이블을 보실 수 있습니다.
평촌(坪村) | 평촌은 마을에 넓은 들에 있어서 벌말이라고도 하며, 조견(趙 )이 살던 곳이다. 예전에는 이 평촌과 양지편을 합쳐서 동덕동(同德洞)이라고 하였다. |
---|---|
송산사거리 | 송산사거리는 송양초등학교에서 미락골, 옥재, 축석으로 가는 사거리로 원산에서 누원점을 거쳐 서울로 가는 길이 발달하면서 생겼다고 한다. 민락골사거리라고도 한다. |
망수보들 | 망수보들은 송산사거리에서 오리골로 가는 길에 있는 들로 망수보(洑)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씨름밭 | 씨름밭은 덕수원보(洑) 밑의 2천평 정도의 넓은 밭으로 이 곳에서 단오 때면 씨름을 했다고 하여 밭여진 이름이다. |
더운우물 | 더운우물은 덕수봉 밑에 있으며 수량이 많고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
방아다리 | 방아다리는 더운우물 옆으로,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알밑둥우리 | 알밑둥우리는 평촌에서 축석을 가자면 오리골 입구 오른쪽에 있는 조그마한 동산으로 둥글게 생겨 꽃봉이라고도 한다. |
오리골 | 오리골은 원래는 옥재에서 이 곳까지 5리(里)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곳에 낙곡(樂谷) 진익한(陣翼罕)이 부계(鳧溪)라는 표석을 세워 놓아서 오리(鳧)골이 되었다고 한다. 부계(鳧溪)표석 |
부계(鳧溪)표석 | 부계표석은 낙곡(樂谷) 진익한(陣翼漢)이 세워 놓은 표석으로, 오리(五里)골이 오리(鳧)골이 된 원인이 되었다. |
개바위 | 개바위는 오리골에서 남쪽으로 보면 개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호랑바위 | 호랑바위는 개바위 맞은편 양지쪽에 있는 바위로, 이 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에 오리골에 한 효자·효부가 살았는데,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형님댁으로 가던 중 바위에 앉아 있던 호랑이가 맞은편 개바위를 바라고다가 이들을 개로 착각하여 물어 죽인 후 사람을 죽인 것을 깨닫고 그 시신을 부모의 무덤 앞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이바위를 호랑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
삼태골 | 삼태골은 오리골에서 옥재로 오르는 첫골짜기로 골짜기의 모양이 삼태기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도둑골 | 도둑골은 삼태골을 지나 왼쪽 양지 골짜기로 일제시대에 독립군이 숨어 있었다는 골짜기로 입구는 좁으나 안의 면적은 꽤 넓다. |
남근봉(男根峰)과 여근곡(女根谷) |
도둑골의 오른쪽에 있는 봉우리가 남근봉이고, 윗쪽에 있는 골짜기가 여근곡이다. |
가마소 | 가마소는 부연곡(釜淵谷)이라고도 하며, 장마에 유실되어 지금은 없어졌다. |
짝박굴 | 짝박굴은 이 곳에 독바위(기석)가 아래 위로 두 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에 있는 독바위는 부엉이가 항상 울었다고 하여 부영바위라고도 하며 그 앞에 마을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던 흔적인 제단이 현존하고 있다. |
기석(祈石) | 기석은 짝박굴에 있는 독바위로 매월당이 기석령(祈石嶺)이라는 시를 남겨서 유래한 이름이다. 사람들이 이 기석에 돌을 던져 얹히면 아들을 낳거나과거에 급제하는 등 소원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석령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祈 石 嶺(기 석 령) 산천운설족(山泉雲 足) 산골 샘물은 구름을 물어 당기고 초로첨인의(草露沾人衣) 산초의 이슬은 사람의 옷깃을 적시우며 장가행로난(長歌行路難) 흥얼거리며 가도 가도 산길은 험한데 욕실서산미(欲悉西山薇) 나도 서산의 고사리나 캘가나 세고하핍측(世故何 側) 속세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고 운림무시비(雲林無是非) 구름과 수풀은 시비가 없는데 하가불수거(何加拂袖去) 이렇든 저렇든 결연히 속세를 떠나 온와청산비(穩臥靑山扉) 청산을 집 삼아 살련다 (梅月堂 金時習) |
옥(玉)재 | 옥재는 포천과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옥(玉)이 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둔바위 | 둔바위는 무지랭이 밑에 있는 바위로, 넓적하고 큼직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뒷골천둥지기 | 뒷골천둥지기는 오리골 뒤에 있는 논으로 주위에 수리시설이 없어서 하늘만 바라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방화골(芳花洞) | 방화골은 이른 봄부터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갖가지 꽃들이 만발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윗방화골과 아랫방화골로 나뉜다. |
돼랭이터 | 돼랭이터는 아랫방화골 앞 오른쪽에 있는 밭으로 그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첫골 | 첫골은 방화골에서 초천의 무내미로 가는 길의 첫 번째 골짜기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
꽃봉 | 꽃봉은 봉우리가 꽃처럼 이쁘게 생겼고 꽃도 일찍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뒷골 | 뒷골은 옥재밑의 골짜기로 뒤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불당골 | 불당골은 꽃봉 맞은 편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가는봉 | 가는봉은 불당골의 뒤에 있는 봉우리로 기다랗게 산등이 가늘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범바위 | 범바위는 가는봉 밑에 있으며, 바위가 호랑이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범바위모퉁이 | 범바위모퉁이는 낙양동과 자일동의 경계를 이루는 모퉁이로 범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옻물터 | 옻물터는 서라리 고개 밑에 있으며, 이 물을 마시면 옻 오른 것이 고쳐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양지말 | 양지말은 양지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지편 또는 양지리라고도 하며, 윗말과 아랫마을로 나뉜다. |
명마골 | 명마골은 예전에 이곳에서 말을 길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바가지우물 | 바가지우물은 명마골에 있으며, 바가지로 물을 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산골(山骨)이라고 하는 파란 광채가 나는 돌이 났다고 하는데 뼈가 부러진데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
병풍바위 | 병풍바위는 명마골 안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병풍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방치골 | 방치골은 명마골 아래 왼쪽 골짜기로 방치라는 다듬이돌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
두껍바위 | 두껍바위는 능안에 있는 바위로, 두꺼비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껍바위의 입이 방화골로 향해 있어 방화골은 흉년이 들고, 뒤는 양지편으로 향해 있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능안 | 능안은 말무덤 위 원선(元宣)의 묘가 있는 골짜기로,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말무덤 | 말무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시신을 한 데 모아 묻은 곳으로 능안 아래쪽에 있다. |
능안고개 | 능안고개는 양지편에서 능안으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등 | 진등은 바닥이 진흙으로 이루어져 붙여진 이름이며, 이 곳 옆에 우라리짝이라는 지명이 있다. |
고창모루(高唱隅) | 고창모루는 조견(趙)과 원선(元宣)이 이 곳에 앉아서 원선이 퉁소를 불면 조견이 사군곡(思君曲)을 읊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봉화봉 | 봉화봉은 양지편 뒤의 봉우리로, 봉화를 올렸던 곳으로 봉화둑이라고도 한다. |
두루봉 | 두루봉은 봉화봉 옆의 봉우리로, 매를 날렸다고 하여 매봉재라고도 하고, 오독재라고도 한다. |
동덕동(同德洞) | 동덕동은 예전에 양지편과 벌말을 합쳐 부르던 이름으로, 덕이 크신 조견(趙 )과 원선(元宣)이 이 곳에 함께 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 사람들은 흔히 동도울로 부른다. |
뒷골 | 뒷골은 뒤에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봉화봉에서 이 곳으로 내려오는 물이 있는데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
연무골고개 | 연무골고개는 양지편에서 연무골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쑥모루 | 쑥모루는 연무골 끝에 있는 산모퉁이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외미둑 | 외미둑은 양지편의 윗말과 아랫말 사이에 있는 기다락 둑으로, 이 곳에는 치갈치밭, 외딴밭, 가내논 등이 있다. |
유두들 | 유두들은 송양초등학교 뒤에 있으며, 유두보(洑)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항아리 같이 동그란 잔돌이 많았다는 독돌밭이라는 밭이 있고, 논들이 많다. |
보통머루 | 보통머루는 송양초등학교 앞에 있으며, 초등학교의 예전 명칭인 보통학교 앞에 있는 모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복두논들 | 복두논들은 양지편과 벌말 사이에 있는 산으로, 곡식이 잘 여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말배미논, 매기배기논, 장구배미논, 새경논, 모새논보, 군주보, 구정보, 독보, 대위보 등 논이 산재해 있다. |
끝밤나무들 | 끝밤나무들은 쑥모루 앞에 있으며, 밤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방아다리 | 방아다리는 유두들에 있으며,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궁말(宮村) | 궁말은 최사의(崔士儀)의 따님이자 세종의 후궁인 명의궁(明懿宮)이 친정조카인 민(旼)의 집인 이 곳에 와서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연무골(煙霧谷) | 연무골은 항상 안개가 자욱하게 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연우골이라고 한다. |
신선방아골 | 신선방아골은 연무골 오른쪽의 긴 골짜기로, 경치가 너무 좋아 신선이 놀고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신선바위와 신선방아골샘물이 있다. |
법적골 | 법적골은 신선방아골 너머 양지쪽 작은 골짜기로 절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법자(法字)가 들어가는 절이 있어서 법적골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현재도 흔적은 남아 있다. |
삼테미고개 | 삼테미고개는 연무골에서 자금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연무골고개라고도 한다. 골짜기가 삼테미 모양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를 타고 곤제쪽으로 나가면 마나리고개가 나온다. |
복사골 | 복사골은 삼테미고개 밑의 골짜기로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능안 | 능안은 궁말뒤의 산으로 이 곳에는 범과 같이 생긴 범바위가 있고 도당골이라고도 한다. |
조산(朝山) | 조산은 아침에 해가 제일먼저 이 곳에 비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어린이 놀이터가 들어서 있다. |
용새울 | 용새울은 연무골 아래 논으로, 예전에 물이 잘 나오는 샘물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구렁논과 보비논, 샘논이 있다. |
진두골(진두고래) | 진두골은 궁말 앞의 논으로, 바닥이 찰진흙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구렁논과 거척논이 있다. |
곤제고래실 | 곤제고래실은 궁말에서 곤제 모퉁이 가기전 왼쪽에 있는 논으로, 이 곳에는 열두배미논이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곤제(昆弟) | 양주조씨(楊州趙氏)의 족보에 의하면, 이 마을의 원래 지명은 양주(楊州) 외송산(外松山) 섭뒤울이라고 했으니 섭은 땔나무(柴) 즉 섶의 옛말로 시북면(柴北面) 뒷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또한 5백여년전 양주조씨 두 형제가 이 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하고 살기 시작하였다고 해서 곤제라고 불렸는데 형 조극관(趙克冠)은 단종 원년(1453)에 병조판서를 지냈고 동생 조수량(趙遂良)은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으나 계유정란 때 두형제가 모두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지금도 두 형제의 무덤이 이 마을 뒷산에 있고 그 후손들이 이 곳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
곤제모퉁이 | 곤제모퉁이는 궁말에서 곤제로 가는 산모퉁이로, 곤제로 가는 모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어렁굴개울(芙蓉川) | 어렁굴개울은 부용천을 발하며, 수락산에서 나오는 물과 민락동 무지랭이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져서 삼각형 모양의 개울이다. 이 개울을 곤제나 궁말 사람들은 어렁굴개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곤제 앞 논에 이 물을 대서 곤제보(洑)라고도 했다고 한다. |
너구리바위 | 너구리바위는 곤제 입구 오른쪽 얕은 산에 있는 바위로 너구리가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전나무백이 | 전나무백이는 곤제 위쪽 마을인 윗말 옆에 있으며, 전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전나무는 남아 있지 않다. |
색시골과 감자무골 | 색시골과 감자무골은 곤제에서 자금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로,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포천에서 가마에 색시를 태우고 초행을 오는데 이 곳에서 도적떼가 색시를 죽이고 감쪽같이 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윗말 | 윗말은 곤제 위에 있는 마을로 집이 몇 채 되지 않았는데, 형님은 위에 살고 동생은 아래에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곳에는 골목밭이라고 불리는 긴 밭이 있다. |
낮은턱고개 | 낮은턱고개는 곤제마을 사람들이 의정부로 나갈 때 넘어 다니던 작은 등성이로 고개가 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선달모퉁이 | 선달모퉁이는 의정부에서 곤제로 들어가는 모퉁이로, 궁말에서 의정부로 나갈때도 이곳을 지나 다녔다고 한다. |
모라지밭 | 모라지밭은 선달 모퉁이를 지나 오른쪽에 있는 밭으로 모래로 되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산모퉁이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새말 | 새말은 마을이 생긴지 얼마 안되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구사(舊寺) 터라고도 한다. |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 문화예술과 문화종무팀
- 031-828-4334